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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가 갔다. 인간 시계로 이 년, 개들 시력(時歷)으로 십 년이 흘렀다. 찬성과 에반은 어느새 서로 가장 의지하는 존재가 됐다. 비록 움직임이 굼뜨고 귀가 어두웠지만 에반은 여느 개처럼 공놀이와 산책을 좋아했다. 찬성이 보푸라기 인 테니스공을 멀리 던지면 에반은 찬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반드시 공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무언가 제자리에 도로 갖고 오는 건 에반이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찬성은 때로 에반이 자기에게 물어다 주는 게 공이 아닌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공인 동시에 공이 아닌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에반이 요즘 좀 이상했다.
할머니는 밤 열 시 넘어 집에 들어왔다.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서였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어.
찬성이 봉지 안을 들여다봤다. 은박지 사이로 설탕 입힌 통감자가 보였다. ㉠찬성이 퇴근한 할머니 뒤를 졸졸 쫓았다.
―할머니, 에반이 좀 이상해.
―지금 안 먹을 거면 냉장고에 넣어 두든가. 할머니가 평소 휴대품을 넣고 다니는 손가방을 안방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할머니, 에반이 밥을 안 먹어.
―늙어서 그래, 늙어서.
―있지, 내가 공을 던져도 움직이지 않아. 걷다 자주 주저앉고.
―늙어서 그렇다니까.
할머니는 모든 게 성가신 듯 팔을 휘저었다. 그러곤 끄응 소리를 내며 바닥에 이부자리를 폈다.
―저거 봐, 저렇게 자기 다리를 자꾸 핥아. 하루 종일 저래. 아까는 내가 다리를 만졌더니 갑자기 나를 물려고 했어.
㉡할머니가 요 위에 누우려다 말고 상체를 들어 찬성을 봤다.
―아니, 진짜로 문 건 아니고 무는 시늉만 했어.
할머니가 눈을 감은 채 이마에 팔을 얹었다.
―할머니, 에반 데리고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닐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자. 사방에 불 켜 두지 말고.
할머니의 반팔 소매에 엷은 김칫국물이 묻어 있었다. 찬성이 할머니 옆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주춤거렸다.
―할머니, 에반 병원 데려가야 할 것 같다고.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개를 병원에 데리고 가. 사람도 못 가는 걸. 그러니까 내가 개새끼 도로 갖다 놓으라 했어 안 했어? 할머니 화병 나기전에 얼른 가서 자. 개장수한테 백구 팔아 버리기 전에. 얼른!
―백구 아니야!
㉢ 찬성이 전에 없이 큰소리를 냈다.
―뭐?
그러곤 이내 말끝을 흐리며 소심하게 답했다.
―에반이야.
[중간 부분의 줄거리] 에반을 데리고 동물 병원에 간 찬성은 고통받는 에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안락사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찬성은 안락사
비용 십만 원을 모으기 위해 힘들게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나 찬성은 이전에 할머니가 얻어온 휴대 전화의 유심칩을 사는 데 모은 돈의 일부를 쓰게 되고, 휴대 전화에 집중하느라 점차 에반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다.
오랜 궁리 끝에 찬성이 지갑에서 동물 병원 명함을 꺼내 들었다. 상중(喪中)이라 주말까지 쉰다는 말이 생각났지만 찬성은 괜히 한번 병원 전화번호를 눌러 보았다.
‘어쩌면 문을 열었을지도 몰라. 누가 받으면 뭐라고 하지?’
휴대 전화 너머로 익숙한 연결음이 들렸다. 찬성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슴이 뛰었다.
㉣몇 차례 긴 연결음이 이어졌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찬성은 동물 병원 쪽에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이상한 안도를 느꼈다.
찬성이 지갑 안에 명함을 넣으며 남은 돈을 세어 보았다. 십만 삼천 원.
에반을 병원에 데려가기에 부족하지 않은 액수였다. 오늘만 지나면,
그러면 꼭…… 다짐하며 일어서는데 찬성 무릎 위의 휴대 전화가
아스팔트 보도 위로 툭 떨어졌다. 찬성이 창백해진 얼굴로 황급히 휴대 전화를 주워 들었다.
그러곤 실금 간 왼쪽 모서리부터 확인했다. 찬성이 거미줄 모양 실금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문질렀다.
아주 고운 유리 가루 입자가 손끝에 묻어났다. 찬성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 집으로 가는 길, 찬성은 한 손을 길게 뻗어 휴대 전화를 좌우로 틀며 햇빛에 비춰 봤다.
검은 액정 표면에 닿은 빛이 물에 뜬 기름처럼 매끈하게 일렁였다.
더불어 찬성의 가슴에도 작은 만족감이 일었다. 액정에 보호 필름을
붙이니 왠지 기계도 새것 처럼 보이고, 모서리 쪽 상처도 눈에 덜 띄는 것 같았다.
스스로 에게 조금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했다.
찬성은 ‘구경이나 해 볼 마음’으로 휴게소 전자용품 매장에 들렀다 액세서리 용품 진열대 앞에 한참 머물렀다.
그러곤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한 보호 필름을 만지며 자기도 모르
게 “사흘…….”하고 중얼댔다. 그러니까 사흘 정도는……
에반이 기다려 주지 않을까 하고. 지금껏 잘 견뎌 준 것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사흘만 참아 주면 안 될까.
당장 가진 돈과 앞으로 모을 돈을 셈하는 사이 찬성은 어느새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갑 안의 돈이 어느새 구만 오천 원으로 줄어 있었다
- 김애란, 「노찬성과 에반」 -